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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세계/문화재

[스크랩]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5

충청복지신문 2009. 7. 10. 16:06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1>대조영이 야망을 꿈꾸던 땅 차오양
고구려 부흥을 향한 지혜가 싹튼 곳
초린과 숙영공주 역사기록 없어
'고씨' 고구려 '대씨' 발해로 정치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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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역사 발해사를 찾아 나선다. 발해사 찾기는 우리 역사의 경계와 지평을 잃어버린 왕국의 기억이 서린 만주 요동 연해주까지 넓혀나갈 것이다. '궁금하면 두드려라'는 말이 있다. 그 궁금증 앞에서 이 기획은 발해사를 활짝 여는 문이 될 것이다.
차오양 근교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요나라(遼代)의 마운탑(摩雲塔). 높이 37m의 13층 방형 벽돌탑으로 요에 귀화한 발해 지배층 유민들도 참가하여 조영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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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청년 장수 대조영은 초린과 숙영 중에서 과연 누구를 선택하여 황후로 삼을 것인가. 요즈음 인기있는 TV 사극 '대조영'을 보는 이들의 관심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주 접하는 질문은 과연 초린과 숙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등이다. 대조영에게 여인이 있었겠지만 초린과 숙영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발해 초대 고왕 대조영은 청춘기를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가 결혼하고 고구려 부흥의 꿈을 왕성히 피우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을 것이다. 차오양은 당시 영주(營州)로 불리던 곳으로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 등이 고구려에서 669년경 옮겨와 696년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698년)하기까지 27년 간 살던 곳이다. 대조영의 아들 제2대 무왕도 차오양에서 태어났을 개연성이 크다.

차오양이 발해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곳으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곳은 고구려 부흥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 곳이자,발해 멸망 후로는 지식층 유민들이 요나라 문화의 발전을 위해 활약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요나라 불교유적에는 발해유민들의 열정과 지혜가 담겨있을 것이다.

발해국은 고구려 장수 출신의 대조영 등에 의해 698년 건국되어 926년 멸망할 때까지 15대왕 228년간을 유지했던 왕조이다. 그 영토는 지금의 북한지역과 중국 3성으로 불리는 지린성(吉林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랴오닝성 일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남부로 고구려의 영역에서 동북으로 좀 넓어진 형세였다.

필자가 차오양을 처음 답사한 것은 1997년 8월 이곳과 인접한 푸신(阜新)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된 3박4일간에 걸친 요금거란사연구회 주최의 발표 때였다. 초청자는 중국 동북민족역사학자이자 동북공정 이론가인 선양(瀋陽)의 쑨진지 선생이었다. 발표 주제는 '고려 내투·내왕 거란인'으로 고려에 투항하거나 왕래한 거란인 상당수는 발해유민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나 혼자서 베이징 등 중국 각지에서 온 50여 명의 참석자들과 두 도시 유적을 순회하며 발표와 토론을 하였던 것이 인상 깊었다. 첫날과 둘째날은 푸신에서 그리고 다음날은 차오양에서 보냈다. 차오양에서도 요대(遼代)의 마운탑(摩雲塔)이 있는 봉황산 기슭의 운접사(雲接寺)와 차오양 시내의 연도빈관(燕都賓館) 등이 행사장으로 사용되었다. 토론회에서는 발해가 과연 어느 민족의 역사인가,하는 민감한 질문도 나에게 던져져 잠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우호적인 분위기는 유지되었다.

차오양은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던 곳이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이듬해부터 평양과 요동지역의 민호(民戶) 3만8천200호 약 15만명을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하였다고 하는데,사극에서 대중상으로 묘사되는 걸걸중상도 그 한 세력에 속했다. 강제 이주세력에는 이외에도 대조영과 함께 건국 길에 올랐다가 전사한 걸사비우(乞四比羽)나 안서도호부 고선지장군(?~755),그리고 이 지역의 지방장관이 되어 당조정까지 위협하였던 이정기(732~781)의 선조 등이 있었다.

그런데 거란의 이진충(李盡忠)과 이해고(李楷固)도 바로 이곳 차오양에서 대조영과 함께하고 있었다. 사극이 대조영의 첫사랑을 이진충의 딸인 초린으로 등장시킨 것도 바로 영주에서의 동거를 염두에 둔 설정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진충은 발해가 건국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장본인이었다. 당나라 영주도독 조문홰의 학정에 분을 품고 그를 살해하면서 촉발된 '이진충의 난'(696~697),즉 '영주의 난'이 발해 건국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당서'(940~945년 편찬) 북적열전 발해전은 대조영의 영주에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가 살았다. 만세통천연간(696~697)에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대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가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남은 무리를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죽이고 또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고 이해고는 탈출하여 돌아왔다… (대조영은)성력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랐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보자면 영주 즉 차오양에서는 대조영과 이진충,그리고 걸사비우가 함께 당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진충에게 영주는 본거지였다. 거란의 발상지는 지금의 중국 내몽고 츠펑(赤峰)시 관할 서요하(西遼河)의 상류인 시라무렌(西拉木倫) 강 유역이고,몽골인들은 지금도 거란이 그들의 조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이진충이 반기를 든 것은 이러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남 손만영(孫萬榮)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고 실패하였다. 그러나 대조영의 고구려부흥은 성공하였다. 발해가 건국된 것은 요동 등에서 아직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과 영주의 지도자 대조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진충의 반란을 유도한 것은 바로 대조영 세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검모잠을 중심으로 평양 지역에서 일어났던 고구려부흥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망명의 차오양에서 고구려부흥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들이 토대가 되어 세워진 발해국은 성공하였다. 30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고씨 고구려에서 대씨 발해로의 정치 순환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푸신에서 몽골인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중국식의 멸시적인 '몽고'라는 이름을 꺼리고 칭기스칸의 후예인 '몽골'인임을 자부한다. 결혼식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진행되었으나 축하연은 몽골문화 그대로를 보여줬다. 한국인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정서가 우호적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마침 당시 중국에서 인기가 있었던 프로축구에서 100만도 안된다는 조선족의 연변 오동팀이 성 대표들을 누르고 상위권에 진입하고 있었던 것도 한국인을 더욱 극진히 대접한 이유였다. 연변 오동팀은 조선족의 대표가 아니라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대표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오동팀의 해체는 예견된 것이었다.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2> 고구려인들의 영원한 고향 요동벌
고구려 유민 저항운동 들불처럼 번져
평양성 함락에도 안시성 등 11개 성 끝까지 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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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극을 보면 역사란 죽이고 죽는 전쟁뿐인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어떤 네티즌은 한민족이 외적의 침략을 받은 것은 931번 정도였다고 한다. 큰 전쟁으로는 일본과 17회,중국과 33회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통 중국왕조 가운데 우리와 직접 부딪힌 것이 한(漢)과 수·당(隋唐)이 대표적이었기에 숫자는 이보다 적다.
상당수 사람들은 중국과 북방민족을 구별치 못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도 거란과 여진,원,청을 중국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의 전쟁터로 요동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지금의 한국사가 있게 한 지역으로 그 중심에는 고구려인들이 있었다.

고구려 유민에 의한 발해 건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부흥 의지를 살피는 것은 필수다. 한국사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에서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반도 중심의 신라보다 대륙 중심의 고구려를 의식한 나머지,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에 다름이 아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고구려 땅에 세워진 발해는 이미 한민족의 왕조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당나라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항거하며 고구려 부흥을 꾀했던 안시성(사진 아래쪽이 내부). 사진 중간이 성곽 흔적이다. 양만춘 장군이 주민과 함께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랴오닝성 하이청(海城) 남동쪽의 잉청즈(英城子)로 지금은 한국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제한돼 있다. 사진 제공=서길수 서경대 교수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 많은 고구려민들은 잠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신라로 그리고 일부는 몽고 방면의 돌궐 등으로 이주하였는가 하면,소수는 일본열도로도 이주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지배층 및 부호들을 비롯한 2만8천여 호는 당나라로 내지로 옮기게 되었는데,이는 당이 고구려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당으로 이주된 세력 가운데에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집안과 같이 영주(차오양)로 간 세력이 있었는가 하면,고선지와 같이 안서인 서역 근방으로 이주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부류도 있었다.

당으로의 강제 이주정책은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일으켰다. 670년에 설인귀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출정한 틈을 타 검모잠(劍牟岑)이 일으킨 고구려 부흥 운동이 그것이다. 평양성에서 일어난 검모잠은 신라로 간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옹립한 뒤 지금의 황해도 재령인 한성을 근거지로 항쟁하였다. 부흥 운동의 불길은 또한 요동 안시성으로 번져갔다. 강제 사민(徙民)의 여파로 불만에 차 있던 유민들은 당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부흥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앞서 668년 고구려 멸망 때 평양성의 함락과 보장왕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구려 성들은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당시의 성(城)이란 오늘날의 시·군과 같은 행정단위였다. 당시의 전선(戰線)은 오늘날과 같은 선이 아니라 하나의 포스트인 점(點)이었다. 때문에 보급로가 문제만 없다면 항복하지 않은 성을 젖혀두고도 얼마든지 평양성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성들 가운데 당의 무력에 정복당한 성은 혈성과 은성,사성,3개 성밖에 없었다. 평양성의 함락과 함께 양암성 등 11개 성이 스스로 항복하여 전체적으로 당나라가 장악한 성은 14개였다.

이에 반하여 당나라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성은 18개였다. 그 중에서 항복하지 않고 계속 대항한 성은 11개로 북부여성,백석성(백암성),안시성,요동성,신성 등이었으고,항복하지 않고 주민들이 일시 도망한 성은 연성 등 7개였다. 이미 발해가 건국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양성의 함락과 고구려 멸망은 당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사실상은 신라에 의한 것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신당(나당)연합군이 결성된 것은 다름 아닌 김춘추의 외교력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관할하기로 하였던 밀약과 고·수(高隋),고·당(高唐)전의 뼈아픈 복수전을 위해서,신라는 당나라에 최후 승리의 기회를 주어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당시 신라의 역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문무왕 8년:668년)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에 이르러 여러 총관들에게 명하여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싸워 크게 무찔렀다. 9월 21일에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평양성 공격은 당나라에 의해서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나라가 개선할 때에는 당나라 이적과 승전군의 일환으로 신라의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그리고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함께하였다.

당나라의 9도독부(고구려),계림도독부(신라),웅진도독부(백제) 설치를 통해 그 야욕을 깨닫게 된 신라는 당나라 축출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이때의 신라군은 통일을 위해 상쟁하던 삼국시대의 신라군이 아니라,백제와 고구려인들까지 합세한 '통일신라군'이었다. 설인귀의 잦은 공격도 이들을 통해서 막아내었다. 고구려 유민의 강력한 저항과 통일신라군의 공격으로 안동도호부는 676년 평양을 버리고 요동(遼東)의 고군성(故郡城:라오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으며,도호부는 이어 677년에는 신성(新城:푸순)으로,705년에는 평주(平州)·요서군(遼西郡) 등으로 옮기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관할하기로 한 당과의 밀약과 경주의 지역적 한계로 말미암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 건국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국인들과 대화하면 난감할 때가 있다. 중국을 갈 수 없었던 1987년 겨울 대만에 가서 자료 수집과 언어연수를 하였다. 당사(唐史)를 공부하지 왜 하필 발해사를 하느냐는 질문은 그저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이후 방문한 중국 학자들과의 대화는 좀 달랐다. 평화를 생각하며 학문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해 와 화가 난 적이 있다. 그의 말에는 중국에 저항하거나 반하는 학문은 평화가 아니라는 중국중심적 시각이 짙게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학문이 아니라 정치였다. 20개국과 인접한 중국으로서 변방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나 패권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로 주변국을 설득하려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한 사회가 이룩되어 온 과정을 다만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역사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날을 기대해 본다.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3> 대조영·이해고의 숙명 '천문령 전투'
당나라 추격군 물리치고 가자 둔화로!
측천무후, 이해고 앞세워 발해 건국 집요하게 방해
대조영 '운명건 싸움' 대승 후 고구려 부흥 꿈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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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걸걸중상 등 대조영 집안도 이진충의 난에 깊이 간여했을 거라는 시각이 일반적이기에 둘은 영주에서도 알고 지냈다고 볼 수 있다.

TV 사극이 그린 것처럼 대조영이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영주로 갔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설령 대조영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활약의 주인공은 아버지 걸걸중상이었다. 대조영의 사망 연대는 719년으로 분명하다. 고구려 멸망이 668년 그리고 발해 건국이 698년이니 그가 70세에 죽었다면 649년생으로 영주로 갈 때에는 20세 정도였고 발해를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지역에서 건국할 당시는 50세였다.

그런데 구당서가 발해 건국을 이끈 지도자를 대조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신당서'(1044~1060편찬)는 그 아버지 걸걸중상에서 대조영으로 그 임무가 바뀌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당서 내용이 걸걸중상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풍부한 기록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발해 건국을 위해 영주를 탈출할 때까지 고구려 부흥세력의 중심은 대조영의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물론 대조영은 충분히 아버지의 뜻을 대행할 정도로 나이나 경륜을 갖춘 지도자였기에 발해 건국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대조영과 이해고가 일전을 벌였던 천문령을 연상케 하는 장백삼림 지구 고개. 화띠엔과 찡유(靖宇)에서 장백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발해 건국 과정에 함께하였던 사람 중에는 말갈 추장 걸사비우가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대조영의 부하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그는 대조영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 정도의 장수였다. '신당서'는 이 부분을 자세히 전한다. "사리(舍利)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책봉하여 허국공(許國公)을 삼고 걸걸중상으로 진국공(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索仇)를 시켜 쳐 죽였다… 조영은 곧 비우의 무리를 합병하여 지역이 (당나라와)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불렀다."

천무후가 발해 건국 만류를 위해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그리고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삼아 회유하였다고 전한다. 책봉 순서도 걸걸중상보다 걸사비우가 먼저였던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항복한 장수 이해고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이해고가 그 뒤 대조영에게 패배함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의 신임을 두텁게 입고 상까지 받았던 것은 거물급 걸사비우를 제거했던 공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은 천문령전투였다. 대조영이 추격해온 당나라 장수 이해고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기에 발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해고는 수차례 출병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을 정도로 발해 건국을 집요하게 방해했지만 결국에는 아무 성과없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휘파허 유역 동쪽의 화띠엔시에 있는 소밀성 발해성터 유적. 화띠엔시는 대조영이 천문령을 넘어 건국길에 올랐던 길목이자 거란과 교통하였던 영주도의 길목에 있는 도시이다.


천문령이 어디인가 하는 점은 많은 견해들이 있으나 대체로 현재 요하 동쪽의 훈허(渾河)와 휘파허(輝發河)의 분수령인 지린하따링(吉林哈達嶺)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후일 발해에서 거란으로 가는 영주도(營州道)의 길목이었다. 대조영은 바로 이곳 휘파허 부근에서 추격해 오던 이해고를 대파하고 발해 건국에 성공하였다. 이해고가 겨우 "몸을 빠져나가(脫身)" 요서지방으로 되돌아갔다고 전한다. 이곳에서의 승리가 없었던들 고구려 유민들의 꿈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천문령으로 짐작되는 하따링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랴오웬(遼源)시,그리고 동쪽 휘파허 유역 도시로는 메이허코우(梅河口),류허(柳河),휘난(輝南),판스(磐石),화띠엔(樺甸)시 등이 있다. 화띠엔시에는 국가급 소밀성(蘇密城) 발해성터가 남아 있다.

당시의 국제정세도 대조영에게는 유리했다. '구당서'가 "이 때 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게 항복하였으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무후)도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푸순)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도 유명무실하였다. 아울러 신라의 당 축출전쟁으로 신당간에도 대결적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보다도 발해 건국의 성공 원인은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다는 것과 고구려 유민들을 잘 조직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필자가 천문령 근방을 처음 답사한 것은 1994년 11월이었다. 휘파허 하류의 송화호(松花湖) 근방에 위치한 지린(吉林)시에서 관련 학자들을 방문하고 부여·고구려 및 청동기 유적으로 유명한 동단산(東團山) 및 서단산(西團山) 유적에 이어 휘파허 유역을 거쳐 장백조선족 자치현을 답사하였다. 장백현은 발해 영광탑이 있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천문령을 체험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화띠엔 소밀성 유적 이후부터는 역시 난코스였다. 산악과 겨울이라는 악조건으로 인해 4륜 구동 차량을 타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중간에 마적단들이라도 나올 그런 공포감이 스며드는 코스였다. 발해사 학자로는 처음으로 이 코스를 접해 본 감동과 함께 대조영이 이런 곳을 뚫고 발해 건국을 성공시켰구나 하는 감회가 새삼 뭉클하였던 곳이다.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4> 동모산에 자리잡은 최초의 산성-성산자산성
군사적 약점 보인 평양 대신 사방 탁 트인 동모산으로…
인근 영승·육정산 일대 발해 유물·고분 쏟아져
15년전 산성터 찾았다 북한 학자들과도 만나


 698년 대조영 등이 이해고와의 천문령전투에서 승리하고 건국의 터를 잡은 곳은 지금의 지린성 조선족 자치주 둔화지역이다. '신당서'는 이후의 상경(上京)과 비교하여 이곳을 '구국(舊國)'이라 한다. 대조영이 당의 추격을 피해 첫 수도로 삼은 '구국'은 송화강의 큰 지류인 목단강 상류에 위치한다. 그들이 처음 웅거하였다는 '동모산(東牟山)'은 지금 둔화시 서남쪽 시엔루샹(賢儒鄕) 성산자산성으로 본다.
성산자란 '산 위에 성터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그곳 마을도 '성산자촌'으로 북방에 이러한 지명이 많다. 옌지(延吉)에 있는 성자산이나,지안(集安)의 산성자산(山城子山) 등이 그렇다. 그런데 오늘날 북방에는 '동모산'이라는 지명이 전혀 없고 발굴도 완벽하지 못해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곳이 동모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즉 이곳은 방어적 산성일 뿐만 아니라 이 산과 연결된 목단강(牡丹江) 건너 영승(永勝)유적에 발해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으며,또 이곳에서 동북으로 10㎞ 정도에 발해 왕족과 평민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의 동쪽 4㎞ 지점에는 목단강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고,산의 북쪽을 끼고는 사료에 보이는 오루하(奧婁河),즉 대석하(大石河)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남아 있는 성터는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둘레가 2㎞ 정도이고 성곽은 흙과 모래를 섞어 쌓았다. 해발 600m의 나지막한 산성인 이곳은 사면이 탁 트여 있어 외부인의 동태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대석하(大石河)는 북쪽 방어선이다.

그런데 대조영이 왜 평양이 아닌 이곳을 건국 터로 삼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고구려 부흥국이라면 평양을 목적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조영은 그의 출신 지역과,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노출된 평양의 군사적 약점으로 인하여 결코 평양을 첫 수도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TV사극에서 그린 것처럼 대조영이 평양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 기록이 없어 부인도 인정도 할 수 없다). 대조영의 출신은 '속말말갈'로 표현되는 것처럼 송화강(속말수) 유역에서 태어났고 그 세력들은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천문령전투에서 큰 공을 이룰 수 있었고 결국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 대조영이 첫 건국 터로 잡은 동모산(현 성산자산성). 중국 지린성 둔화시 서남쪽에 위치한다. 해발 600m의 나지막한 산으로 산의 북쪽에 대석하(大石河)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필자는 성산자산성을 다섯 차례에 걸쳐 가 보았지만 2005년에는 중국 관원에게 제지를 당하고 들어가지 못했다. 처음 답사한 것은 1992년 여름이었다. 그해 7월 옌볜대 발해사연구소에서 개최된 제2회 발해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발해 유적을 최초로 답사할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었다. 2박 3일간의 학술회의가 끝난 후,발해유적 답사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중국 학술대회의 관례는 주최 측에서 관련 유적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미 발해사는 민감하였던 터라 유적 답사는 묵인하는 정도에서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다. 악조건이었지만 비교적 안심하고 유적을 답사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중국의 발해사 학자들도 반가웠지만,뜻밖에 북한 발해사학자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의미가 있었다.

한편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의 추격군인 거란의 항복 장수 이해고의 추격을 뿌리치고 발해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그를 돕고 있던 '말갈' 세력 때문이었다. 중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는 데 그를 도왔던 세력으로 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인을 꼽고 있다.

과연 말갈인들은 누구인가? 이들과 고구려인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발해는 과연 고구려 유민이 세운 왕조였는가 아니면 고구려와 관계없는 말갈인들이 세운 왕조였는가 하는 점들이 학계의 쟁점이다. 이 문제는 필자가 발해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봉착한 문제였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한 부분이다. 1988년에 내놓은 '숙신·읍루연구'와 '고구려시대 말갈연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결론은 말갈이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니라 고구려 변방 사람들을 낮춰서 부른 종족명이라는 것이다. 고대에는 서울사람만을 나라사람으로 인정하는 역사관이 있었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신라인하면 경주 사람만을 지칭하였다는 것이다. 요즈음도 서울 사람들이 부산 사람을 '시골 사람'으로 낮춰보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고대의 백제사람이란 공주·부여 사람만을 그리고 고구려 사람이란 평양의 도성 안 사람만을 지칭했던 것이다.

▲ 성산자산성에서 내려다 본 오루하(奧婁河). 지금의 대석하(大石河)로 동쪽 4㎞ 지점에는 목단강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 말갈이라는 멸시어는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라,고구려와 당나라 사람들이 낮춰 부른 이름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갈을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갈이라는 말 속에는 부락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백두산 지역 사람을 '백산말갈(白山靺鞨)'이라 한다든지,송화강 유역 사람을 낮춰서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 불렀다. 때문에 '신당서'가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한 것은 '송화강 지역 시골사람'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갈 추장 걸사비우는 고구려 변방 장수로서 고구려를 끝까지 지키던 장수였으며,고구려가 멸망해서는 대조영과 함께 영주로 강제 이주당한 세력의 추장이었다. 끝까지 대조영과 운명을 함께한 걸사비우는 고구려의 정규군에 편입된 세력이 아니라,변방의 독자 세력으로서 말갈 추장이라 불렸던 자이다.

한편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에 끌려가 고구려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당의 안동도독으로 임명되었다가,고구려 부흥을 위해 오히려 '말갈' 즉 고구려 변방인과 공모하였다는 '구당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이때의 말갈도 고구려 변방 현지인에 대한 낮춤말 이외의 다른 뜻이 아니다. "의봉(儀鳳) 연간(676~679)에 당 고종이 고장(보장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임명하여 조선왕(朝鮮王)에 봉하고… 그런데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다시 불러다 늑주(勒州)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 등 여러 주로 분산하여 옮겼다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5> 대조영이 거처한 왕궁은 어디였을까
육정산 고분군 남쪽 영승유적 도성터 정설
고왕 대조영에서 3대 문왕 초기까지 44년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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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부터 시작된,소수민족 역사를 중국사로 만드는 정책은 앞으로 더욱 조용히 치밀하고 강력하게 진행될 것이다. 최근 중국은 장춘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창바이산(長白山),즉 백두산을 형상화한 영상물을 내보냈다. 동북공정은 학술(역사)프로젝트라기보다는 정치·전략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총 51개 기초연구 과제 중 32개가 변경 및 국경문제에 집중돼 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연구재단','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들어졌고,최근의 인기 사극들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것이다. 사극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사에서 소외되어 말갈사나 중국사로 간주되기도 하던 발해사가 '대조영'이라는 사극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대조영이 첫 수도로 삼은 것은 구국(舊國) 둔화지역이었다. 이곳은 그가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출발했던 영주(營州;朝陽)로부터 1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천문령에서는 동북으로 좀 올라간 산악지역이다. 그런데 구국은 대조영이 첫 도읍지로 삼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잠시 거쳐간 지역으로 간주되면서 발해 5경 즉 상경,중경,서경,동경,남경에 포함시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발해 수도가,중경현덕부인 지린성(吉林省) 화롱현(和龍縣) 시구청(西古城) 근방으로 옮기는 742년경까지,이곳에 약 44년 이상 자리했다는 것을 결코 짧게 볼 수는 없다. 왕으로 보아도 고왕(高王,698~719) 대조영(大祚榮)에 이어 그 아들 무왕(武王,719~737) 대무예(大武藝)가 이곳에서 재위했고,심지어 제3대 문왕(文王,737~793) 대흠무(大欽茂)도 초기까지 이곳을 도성으로 삼았다.

그러면 과연 어느 곳이 발해 왕이 거처하던 도성 역할을 하였는가? 그점이 쟁점이다. 44년간 왕이 거처했다면 그 규모가 어떠하더라도 적어도 궁성과 행정관서는 있어야 한다. 고고학적으로 기와나 주춧돌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하곤 한다. 이렇게 해서 지목된 곳이 처음에는 둔화시에 있는 오동성(敖東城)터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요나라 시기의 유물들이 나오고 그 성곽 짜임새 등에서 발해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육정산 고분군 남쪽에 인접한 영승(永勝)유적을 도성터로 강력하게 인정하고 있다. 궁터와 같은 정연한 주춧돌 등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서쪽 5㎞ 지점에 발해 최초 산성인 동모산이 있는 점을 들어 도성터로 보는 것이다. 동모산이 오루하(대석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것은 적의 예상 공격 지점이 적어도 목단강 서쪽이기 때문인데 오동성은 똑 같이 서쪽에 있어서 방어상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발해가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게 된 시기는 당에서 측천무후가 사망하고 705년 중종이 즉위한 뒤였다. 당 조정은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무마했고,대조영도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에 보내어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그 뒤 당은 대조영에 대해서 외교적 승인행위인 책봉례를 거치려 하였으나 거란과 돌궐의 침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711년 돌궐의 묵철(默)이 당에 화친을 바라면서 신하로 복종할 것을 표시하자,당 예종(睿宗,710~712 재위)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713년 낭장(郎將) 최흔(崔)을 발해에 파견하여 양국 관계가 개선될 수 있었다.


▲ 발해의 첫 궁궐터 영승유적. 가운데 산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운 동모산이다. 이전에는 발해 첫 궁터를 오동성터(작은 사진)로 여겼다. 현재 오동성터와 관련해서는 영승유적에서 옮겨와 도성으로 삼은 곳이라는 견해 등이 제기돼 있다.


그는 발해(당시는 진국振國)에 들어와서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책봉을 전달하였고,그 아들 대무예(후에 2대 무왕)에게는 계루군왕(桂婁郡王)의 책봉도 전달하고 돌아갔는데 모두가 구국을 수도로 하고 있던 때였다. 아직 '발해국'이 아닌 '발해군'으로 인정되는 한계가 있었지만 당으로선 발해 건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까지 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발해의 요청이 아닌 당에서 먼저 사신을 파견했던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중국은 발해 대조영이 홀한주도독의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외교적 승인 행위의 관행으로 행해지고 있던 책봉례를 이렇게 보는 데 대해서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사학계에서조차도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 이렇다면 백제나 신라,왜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발해의 자주성은 대조영의 시호(諡號) 즉 죽은 후에 부르는 호칭을 고왕(高王)이라 하였다고 '신당서'가 전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조영은 연호도 '천통(天統)'이라 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다른 왕들도 대체로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다고 함은 정치적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발해의 자주성 내지 국호 사용 시기에 대하여 '신당서'가 "(대조영이 책봉을 받았던 713년으로부터)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로만 불렀다"고 전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발해라는 국호가 과연 중국의 주장처럼 당나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어는 당나라로서 그들이 일방적으로 발해를 '말갈'이라 깔보아 부르다가 이때로부터 정식 국호를 따라 '발해'라고 불렀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발해는 건국 때 '떨쳐 퍼진다'는 뜻의 '진국(振國)'이었다가 어느 시점에 와서 '발해'로 고쳐불렀고,그 시기는 적어도 당의 책봉시기 이전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출처 : 휠천국 직거래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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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  (0) 2006.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