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향기에서
성(性)은 아우성일까요
백승균 교수
‘O양의 비디오’도, 그 누구의 ‘아우성’도 성과 성교육을 위한 우리 사회의 한 담론입니다.
성은 무엇이고, 섹스란 무엇입니까? 성이란 성욕의 준말이고,
성욕이란 암컷과 수컷이 서로 결합하고자 하는 자연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그 결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케 하고, 그 종을 번식토록 합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정의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장미여관’에서나 ‘아우성’에서의 성행위 혹은 포르노적 섹스라고 하면,
그 자연적 본질성을 떠나게 됨으로써 이래저래 말썽이 생깁니다.
한편에서는 무차별적인 성행위나 난잡한 포르노 등으로 인해
오늘날을 구제 받을 수 없는 말세라고 하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아주 자연적인 것인데
그러한 섹스를 좀 즐긴다고 해서 어떠냐는 것입니다.
성행위라는 것이 터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큰 비밀처럼,
그것도 엄숙하게 안방에서만 치러야하는가 하고 강변합니다.
어디 이 뿐입니까?
한편에서는 정조(貞操)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조는 무슨 정조냐면서 구닥다리의 관념을 짚어치우라고 욱박지르기도 합니다.
도대체 정조란 무엇인데요?
정조란 이성관계에 있어서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순결을 보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더욱 직접적으로는 깨끗한 절개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는 ‘순결’을 의미하지요.
한 방송사에서 어느 대학의 여학생들에게 순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A군의 여학생들은 남친(남자친구)과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사랑을 위해 정조를 지켰기 때문에 떳떳하다고 하였고,
B군의 여학생들은 정조보다는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에 정조 대신으로)
사랑하는 남친을 얻게되어 떳떳하다고 했습니다.
전자의 학생들은 ‘육체적 순결’을 지목하였고,
후자의 학생들은 ‘정신적 순결’을 지목하였습니다.
앞의 학생들은 부모까지를 의식하였다면,
뒤의 학생들은 자신만을 의식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 양자의 경우 앞에 서서 고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사랑을 따르자니 순결이 문제가 되고, 순결을 따르자니 사랑이 문제가 되니 말입니다.
‘겨울여자’의 주인공 이화는
몇 번의 결혼을 거듭하면서도 늘 자신의 순결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물론 여기서는 육체적 순결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 순결을 의미하지요.
육체적 순결이 한 순간에 그친다면,
정신적 순결은 그 영속성에서 늘 새로워지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어찌 이러한 경우가 한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하겠습니까!
실지로 우리 사회의 유명한 한 여배우 역시 홍성기씨가 첫째 남편이었고,
둘째는 최무룡씨였으며, 셋째는 나훈아씨였고, 넷째는 이종구씨였습니다.
지금은 혼자라고만 합니다만.
참으로 첫날밤을 함께 자고 났다고 해서
나의 처가 더 이상 순결하지 않다고 하는 남편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신적 순결만이 제일이어서
육체적 순결은 그냥 아무렇게나 팽개쳐도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참으로 내팽개친 육체 앞에 온전한 정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a sound mind in a sound body).
그러나 분명한 ‘자기의식’에서 이루어진 성욕일 때는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게 됩니다.
사실상 성 자체라는 것이 인간생명의 원천이고, 문화창조의 근원이 아니었습니까!
세상에 인군(人君)치고 조선 초의 세종처럼
왕자만을 28여명씩이나 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 자체로 보면 세종이야말로 성욕으로 가득 찬 한 제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그를 섹스의 왕이라 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그를 대왕(大王)이라 하고, 성왕(聖王)이라 부르는 것은
백성을 위한 그의 분명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자기의식 (훈민정음 등)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 전체의 정체성을 정신적으로 되찾게 되었다면,
그는 단순한 성욕과 무관한 성군(聖君)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순결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소유할 수가 없으니, 잃어버릴 수도 없는 법이지요.
순결은 분명 존재가 아니고, 샘물처럼 언제나 새로 솟아나는 생성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난잡한 성욕이라도
분명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자기의식’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무모한 성행위가 아니고 성애(性愛)이며,‘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 치고 난잡하지 않는 성이 어디 있고, 성 치고 난잡하기만 성이 어디 있습니까!
성이 난잡하다, 난잡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 순결하다, 순결하지 않다는 것은
반성적 인간 삶의 자기가치에 대한 철학적 책임의식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자기책임의식은 그것이 어떠한 순결이든지 간에 무모한 성에서
‘스스로’를 해방케 하고, 마침내 ‘인간성해방’까지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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