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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일반상식

[스크랩] 고대 중국여성의 족쇄

충청복지신문 2006. 4. 9. 01:12
 

纏 足

 

1.전족(纏足)의 기원

 

전족이란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하여 헝겊으로 묶던 풍습 혹은 작아진 발을 가리킨다. 전족을 세치금련(三寸金蓮)(1寸: 0.1尺. 약 3.33Cm)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육조시대(六朝時代) 제(齊)나라의 동혼후(東昏侯)가 황금으로 연꽃을 새겨 땅에 놓고 반귀비(潘貴妃)로 하여금 그 위를 걷도록 한 후 ‘걸음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나는 구나’라고 말한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전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은(殷)나라 걸왕(桀王) 왕비인 달기(妲己)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달기는 여우가 둔갑한 여자였다고도 하고 꿩이 변신한 여자였다고도 하는데, 그녀의 발만은 완벽하게 변신하지 못해서 천으로 싸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총애를 받게 되자 궁중 여인들이 앞 다투어 발을 싸매게 되었다고 한다), 춘추(春秋)시대에 시작되었다는 설, 전국(戰國)시대에 시작되었다는 설, 진대(秦代)에 시작되었다는 설, 한대(漢代)에 시작되었다는 설, 진대(晉代)에 시작되었다는 설, 육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다는 설, 수대(隋代)에 시작되었다는 설, 당대(唐代)에 시작되었다는 설(元代 사람 李世珍의 [琅嬛記]에 “馬嵬의 노부인이 太眞의 비단 버선을 얻어서 부자가 되었다.

이름이 玉飛인 그 부인은 공작머리가 달린 신발 한 켤레를 얻었는데 신발이 진주로 장식되어 있고 밑창은 얇은 박달나무로 되어 있으며 크기가 겨우 세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오대(五代)에 시작되었다는 설(南唐 李後主의 宮女인 요낭(窅娘)이 아름답고 춤과 노래를 잘 했다.

후주가 그녀에게 명하여 천으로 발을 묶어 발을 초승달처럼 가늘면서도 작고 둥글게 만들고서 그 위에 버선을 신도록 한 후 춤을 추도록 하였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모두가 신화적 이야기이거나 진실성이 입증되지 않은 자료들이라 그 확실한 기원을 알 수는 없다.

 

2. 전족 풍속의 확산
 
전족은 처음에는 주로 궁중 여인들 사이에서 행해졌다. 그러던 것이 점차 민간으로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민간으로 유포되기 시작한 시기는 북송(北宋)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부터 문인들의 작품에 전족에 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전족용 신발인 궁혜(弓鞋)가 상품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족을 다룬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는 소동파(蘇東坡)의「보살만(菩薩蠻)」이라는 아래와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향기로움 아낌없이 내뿜으며
연꽃 밟듯 걷는 걸음
깊은 시름에 젖은 비단버선이
물결치듯 지나가네.
춤사위에 이는 바람만 느껴질 뿐
어디에도 지나간 흔적조차 없다오.
남몰래 궁중식으로 차려 입어 차분한데
나란히 섰던 두 발 넘어지니 애처롭네.
그 섬세한 아름다움 어찌 말로 다하리
그저 손안에 놓고 즐겨 볼 뿐.

 

북송시대부터 전족풍속이 민간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사대부계층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전족이 보편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전족이 사대부계층 부녀자들의 보편적인 풍조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다음 시대인 원대(元代)의 일이었다. 그 후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점차 계층을 막론하고 행했으며, 이어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더욱 성행하였다. 청의 강희제(康熙帝)는 명(明)의 관습을 따라서는 안 된다 하여 전족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그 자신도 전족광이 되어 전족을 한 4명의 한족(漢族) 궁녀를 가까이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족 금지령은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전족이 여성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청대(淸代) 사람인 전영(錢泳)이 “사대부 가문으로부터 편호소민(編戶小民)에 이르기까지 전족하지 않는 이가 없다. 전족은 여인의 용모를 단장하는 한 요건이었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3. 전족(纏足)의 방법

 

전족은 보통 5 - 6세 혹은 7 - 8세에 시작했다.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전족이 가장 성행하였던 山西 및 그 주변지역에서는 4 - 5세에 전족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1)초롱(初攏: 초벌묶기)

 

일부 지방에서는 여자 아이에게 정식으로 전족을 하기 전에 작고 가늘며 코가 뾰족한 신발을 신겨 여아의 발을 단속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없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면 발이 저절로 작아져 전족하기가 수월하다. 이를 초롱(初攏: 초벌묶기) 혹은 시전(試纏: 예비묶기)라고 불렀다. 초롱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 - 2년을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3 - 4세 때 초롱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2)전족의 절차

 

<예비절차>


①발을 감는 데 필요한 천, 전족화, 바늘과 실, 솜(발과 헝겊 사이를 솜으로 채움), 나무로 만든 대야, 더운물, 가위, 명반(明礬: 지혈제)을 준비해 놓는다.
②여아의 발을 깨끗이 씻기고, 발톱을 깎고 나서 명반을 뿌린다.
③여아를 작고 낮은 의자에 앉힌 후 전족해 주는 사람은 바닥에에 앉아서 여아의 발을 자기 넓적다리에 올려놓고 전족을 시작한다.

 

<본절차>


①첫 단계: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네 발가락들을 아래로 굽혀서 묶는다. 처음에는 좀 느슨하게 묶다가 나중에는 발가락이 발바닥에 밀착되도록 꼭 묶는다.
②두 번째 단계: 발의 바깥쪽 뼈를 졸라맨다. 목적은 발의 형태를 가늘게 하기 위해서였다.
③세 번째 단계: 발을 활처럼 굽도록 묶는다. 이렇게 하면 발바닥의 중심은 오목하게 들어가고 발등은 볼록하게 솟아오른다.

 

<전족에 따른 고통>


전족을 하게 되면 처음 시작할 때 통증이 매우 심하고, 천을 풀었다가 다시 졸라맬 때도 통증이 심하다고 한다. 보통 아침, 저녁 두 차례 천을 풀었다가 다시 졸라매기 때문에 전족이 유행하던 시대 중국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여기저기에서 여자아이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전족 한 쌍은 눈물이 한 독"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이 때 부모들은 딸에게 "큰 고통이 있다 해도 꼭 참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커서 시집을 못간다"고 여아를 달랬다고 한다.
통증이 가라앉고 전족이 완성될 때까지는 약 2 -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전족의 관리>


전족은 완성된 후에도 관리를 잘 해야 한다.

①발 닦기: 전족한 발은 냄새제거와 혈액순환 및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굳은살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주 씻어주어야 한다. 부유한 집안의 여성 같은 경우 발 닦는 물에 향료를 타기도 했다고 한다.
②졸라매기: 발을 졸라맨 천이 느슨해지면 발이 변형되고 커지며, 이미 완성된 전족이라도 단단히 졸라맬수록 걷기가 쉬우므로, 전족한 여인들은 수시로 발을 졸라매었다.

 

4. 전족과 여성의 생활

 

전족은 여성들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보행의 고통>


전족한 여인들은 발이 작아서 걷기 매우 힘들었다. 거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담에 의지하거나 막대기나 지팡이 등을 사용해야 했다.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시녀의 부축을 받기도 하였다. 심지어 집안 내에서의 근 거리 이동에도 시녀의 부축을 받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업거나 안아주어야 거동이 가능했다고 한다.
타인의 부축을 받더라도 조금만 걸으면 숨이 가빠진다. 근거리의 이동 후에도 수시로 발을 주물러 아픔을 풀어주어야 했다.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나면 도피가 불가능하므로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잠잘 때>


전족한 여인들은 잠을 잘 때에도 발을 졸라 맨 천을 풀지 않았고, 반드시 바닥이 얇은 수면용 신을 신어서 잠자는 동안 천이 풀어지거나 발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여야 했다. 전족이 완성되지 않은 여인의 경우는 아픔을 덜기 위해 발을 침대 난간 위에 걸치거나, 발아래 물건을 받치기도 하였다. 발을 밤새도록 거꾸로 매달아 놓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


5. 전족의 성행 원인

 

(1)審美觀


중국의 전통사상 가운데 음양(陰陽)이론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음양론에 따르면, 남성은 양(陽)이고 여성은 음(陰)이요 단단함은 양이고 부드러움은 음이며, 큼은 양이고 작음은 음이다. 또 곧음은 양이요 굽음은 음이며, 강함은 양이고 약함은 음이며 움직임은 양이고 고요함은 음이다.
이러한 음양사상이 심미관에 반영되면 소위 여성미란 앙증맞음, 연약함, 얌전함 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갖추어야 한다는 등의 ‘음성적 부드러움’의 측면으로만 체현되게 된다. ‘작다’라는 면에서 보면 앵두같이 작은 입, 오이씨처럼 갸름한 얼굴, 버들가지만큼 가는 허리 등은 모두 여성미의 특징이고 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족이 사회적으로 성행하여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게 된 송대 이전에도 비록 전족 풍속이 아직 형성되지 않아 발을 무조건 적으로 작게 하려는 광적인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이 때에도 여성의 발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관념만은 존재했다.
전족 풍속이 생겨난 뒤로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극심해져 전국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쇠퇴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인 심미관과 더욱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2)심리적 변태


전족을 즐기는 중국 남성들의 심리를 성욕도착증의 일부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성욕도착증은 다른 사람에게 각종 학대와 모욕을 주거나 상대방을 채찍질하고 입으로 물어뜯는 등의 변태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성적인 충동이나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변태적 심리 중에서 전족 풍속의 발생이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요소로서 성적 페티시즘을 들 수 있다. 성적 페티시즘이란 곧 이성의 신체 일부나 어떤 기능 혹은 이성에게서 나타나는 체취나 배출된 체액 내지는 이성이 하는 언행의 특정방식이나 자태 또는 이성의 신체와 관련된 어떤 물건에 관해서 특별히 집착하는 병적 증세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성적 페티시즘 환자들은 전문적으로 여성의 속옷이나 브래지어를 훔쳐 모으는 것을 쾌락으로 삼는다. 전족이 유행하던 시대에는 특별히 여성의 전족을 편애하고 집착해서 괴이한 행동을 하는 성적 페티시즘 환자가 적지 않았음을 각종 문헌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이들은 전족을 한 기녀들의 발 냄새를 맡거나, 만지고 핥는 등의 행위를 보여준다.

 

(3)혼인(婚姻)과 전족


전족은 여성의 혼인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족이 유행하던 시대에는 전족은 남성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었다. 전족하지 않은 여성은 ‘부녀의 품위’를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는 청혼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즉 전족의 크기는 미모나 자태에 비해 중시되고 나아가 여성의 미덕인 현명함과 정숙함보다 중시되었다. 전족이 잘못된 여성들은 시부모로부터 홀대를 받거나, 신랑으로부터 냉대를 받으며 온갖 능욕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전통시대는 전형적인 남성중심의 사회이므로 오직 남성들만이 배우자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이 전족의 멍에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도록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결국 딸을 가진 부모들이 자식의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딸의 평생의 행복과 맞바꾸기 위해 전족을 시행했다고 한다.

 

6. 천족(天足)운동

 

(1)전족에 대한 송대(宋代)의 반성론


전족에 대한 회의와 반대는 송대부터 나타났다.

 

■거약수(車若水): 최초로 전족에 대한 무용론 제기. [각기집(脚氣集)]에서 “여인의 전족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댓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무고하게 끝없는 고통을 주고, 설령 작은 발을 얻는다 하더라도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라고 지적함.


■정이(程頤)와 그의 門人들: 집안 여인들에게 전족을 일절 못하게 함으로써 전족 반대를 몸소 실천에 옮김.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확산되어 전족을 금하는 단계로 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2)청(淸) 초기의 전족 금지:


청 왕조는 개국 직후에 여러 차례 전족을 금지했다. 그러나 당시 청 왕조가 여인들의 전족을 금지한 것은 남자들에게 머리를 깎게 한 것(短髮)과 마찬가지로 한족(漢族)의 풍속을 만주족(滿洲族)의 풍속으로 대체해서 정치적 통치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그들은 한족 여인들의 전족이 그들이 중국을 지배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서는 전족 금지령을 엄하게 집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청 정부가 초기에 전족을 금한 것을 전족 반대운동의 시초로 볼 수 없다.

 

(3)청(淸) 후기 전족 반대론의 고조


아편전쟁(阿片戰爭) 후 중국이 개방되면서 점차 많은 서양인들이 중국에 왔다. 이들은 중국 여인들의 조그만 발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전족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잔인한 행위로 간주하였는데 이는 일부의 중국인들로 하여금 전족을 반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도록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서양 각국으로 유학하여 그곳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접하고 돌아온 유학생들이 전족의 부당함을 주장한 것은 중국인들이 전족에 대한 관념을 바꾸도록 하는 데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천족운동을 실천에 옮긴 인물이 나오기도 하였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이 바로 그 사람이다. 홍수전은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여인들이 정상적인 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태평군이 남경(南京)을 점령한 후 전족금지령을 내리고 위반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864년, 태평군이 청군에게 진압된 후 전족금지는 중단되었다.

 

(4)청(淸) 말의 천족운동(天足運動)


천족운동은 광서(光緖) 말에 이르러 성숙기로 접어들어, 개인 활동에서 단체 운동으로 발전되고, 소수의 각성에서 군중의 보편적인 각성으로 전환되었다.

 

■청 말의 천족운동은 개혁가들이 주도하였다. 


 0.강유위(康有爲): 1883년(光緖9년), 고향인 광동 남해(南海)에서 일부 개화된 향신(鄕紳)들과 연합하여 부전족회(不纏足會) 창립. 1896년(光緖22년)에는 광주(廣州)에서 광동천족운동회 설립.
 0.양계초(梁啓超): 강유위의 제자. 1896년부터 다음 해까지 상해(上海) 『시무보(時務報)』의 주필을 맡는 동안 전족 반대의 계몽에 힘씀. 1897년1월3일(광서22년 12월1일)에는 『계전족회서(戒纏足會敍)』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이후『변법통의ㆍ논여학(變法通議ㆍ論女學)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전족반대.

 

■사숙(私塾)에서 천족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킴: 청말에 여자들의 교육 열풍이 일면서, 학교에 입학한 일부 여학생들이 새로운 사상 교육 아래 전족을 풀기 시작했다. 예컨대 천진(天津)에 있는 엄법손(嚴法孫)이 세운 사숙에 입학한 여학생들은 모두 전족을 풀었다.

 

■천족운동에 있어서의 교회와 전도사들의 노력: 천족운동회을 조직하여 천족운동을 홍보하는 한편 실천에 옮김.

 

(5)민국(民國) 시기 천족운동의 심화


민국에 들어서서 천족운동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의 천족운동의 주요 특색은 정부기관이 전족 금지를 하나의 주요 임무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전족을 금지하기 위한 각종의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전족을 반대하는 단체가 끊임없이 출현한 것 또한 이 시기의 특색 중 하나이다.

 

(6)전족시대의 종결


항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전족의 악습이 전국적인 범위에서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의 천족운동과 정부와 민간의 공동노력에 힘입어, 전족은 이미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족의 악습이 소멸되는 과정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해안이 내륙보다, 남방이 북방보다, 도시가 시골보다, 교통이 발달한 곳이 산간벽지보다 빨랐다.

半邊天(반쪽 하늘)

현재 중국은 남녀가 완전히 평등한 국가이다. 법률상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남과 여가 완전히 평등하다. 아이를 낳았을 경우 부부가 합의를 하면 아이는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 재산 상속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과 사회에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는 남성과 여성이 완전 동등하다.
현재 중국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직업 전선에 종사한다. 업무적으로 남성을 우대하거나 혹은 여성을 우대하는 일이 없다. 사회 통념상 남성이 할 수 있는 일,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다. 도로변 하수구 내에 쌓여있는 흙이나 모래를 치우는 일이나 철도 기관사와 같은 힘이 드는 육체적인 노동에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다. 관광객을 태운 후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도 반은 여성이다. 시내버스 기사도 그러하다.
집안일도 남편 아내의 구분이 없다. 남자도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며 설거지를 하고 청소도 한다. 그리고 여성도 가장이 될 수 있다. 남녀간에는 이렇게 구별이 없다. 남과 녀가 분명 할 일이 다를 것 같은데도 전혀 구별 없이 같은 일에 종사하고, 같은 권리와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남성은 낳을 수 없는 생리적인 차이를 제외하고는, 생활상 사회상 직업상 모든 활동에서 차이와 구별이 존재치 않는다. 여권 신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를 완전한 남녀평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해석하면 여성이라고 조금도 우대하는 면이 없다는 뜻도 된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중국의 모든 여성들은 국가에서 분배해준 직장에서 남성과 조금도 다름없는 일에 종사한다. 사실 중국 여성들은 남성과의 무차별적인 평등이란 명분 아래 혹사당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모택동(毛澤東)은 중국을 해방시킨 후 여성들을 집안의 굴레에서, 전통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사회주의 혁명에 적극 참여토록 만들었다. 그는 중국인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을 집과 전통의 굴레에 그대로 묶어두어서는 진정한 사회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모택동은 여성을 혁명운동의 잠재력으로 인식하고서 ‘여성이 가사 노동에서 탈피해 대규모의 사회적 생산노동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34년에 이미 ‘여성이 원하면 이혼이 가능하고, 여성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자녀의 후견인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많은 여성들이 사회주의 전선에 참가하게 만들었다. 1934년 당시의 봉건적인 시대 상황으로 보아 ‘여성이 원하면 이혼이 가능하고, 여성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자녀의 후견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혁신적이다 못해 혁명적이기까지 한 생각이었다. 이리하여 여성 해방운동은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여성은 사회주의 전사로, 노동자로, 그리고 당당히 사회에 참여하는 구성원으로 만들어졌다.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를 탁아소나 유치원에 맡겨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 교육을 시켜 사회주의 인간으로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정으로부터 이탈시켜 피도 눈물도 없는 사회주의적인 인물로 모택동을 어버이로 섬기는 인물로 양성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아이를 양육하기 위하여 집안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신 중국이 성립된 다음해인 1950년에 선포된 새로운 혼인법에 의해 결혼, 이혼, 재산소유에 있어 여성도 남성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됐으며,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가 확립되었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남성과 같이 보장되었다. 중국 여성들이 가정, 전통, 아이, 남편, 구 봉건적인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주의 전선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공산혁명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여성이 이 세상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半邊天)”고 선언하여, 여성의 남성과 무차별적인 평등을 선언하였다. 당시 남성과 여성의 구별과 차이점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엔 산하의 세계 부녀자대회가 1995년 북경에서 거창하게 열렸다. 세계 각국의 여성대표들이 대거 참석하여 각국의 성차별과 여권운동 등을 고발하고 성토하였었다. 중국 정부는 이 세계 부녀자대회를 각 관영 매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이렇게 중국이 세계 부녀자대회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이면에는 중국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특히 제 3세계 어느 나라보다 남녀 차별이 전혀 없는 남녀평등의 국가라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나라들이 자주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하여 왔는데, 중국 정부는 이를 막고 중국이 완전한 남녀평등의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이 세계 부녀자대회를 유치했고, 유치하고 난 뒤 중국의 완전한 남녀평등 정책을 대대적으로 대외에 홍보한 것이다. 세계에서 중국처럼 완전히 남녀가 평등한 나라가 없다고 주장하며, 중국처럼 여권이 신장된 나라가 없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국은 남녀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녀간의 구별 그 자체도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남녀간에 성차별은 없어야 하겠지만, 남녀간에 엄연히 성적인 구별은 있어야 하는데 그 구별마저 전혀 없다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서구는 여성을 위하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남녀평등이지만, 중국은 무차별적인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3월 8일을 부녀절(婦女節)이라고 하여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날에는 여성노동자는 집에서 쉬며 모든 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된다.


개방 개혁 이전에는 남편이 초청받은 자리에 아내가 같이 동반하여 참석하는 예가 없었다. 당시 지도자들은 외국을 국빈으로 갈 때 혹은 국내에서 외국 국빈을 맞이할 때도 혼자 갔었다. 아내에게는 다른 할 일이 있고, 남편과 완전히 동등한 인격체인데, 남편의 일에 아내를 동반하도록 하는 것은 남편의 부속물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남편은 남편 일에만 아내는 아내 일에만 참가하고 서로 관여 하지 않는다. 부부는 완전히 동등한 존재로, 남편이 직장 동료들을 집에 초청하여도 아내는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아내가 직장동료들을 집안으로 초청하였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개방 개혁 이후 남녀간의 구별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하고, 중국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여성노동자, 사회주의 女戰士를 추구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그 부인으로 하여금 직장을 사직케 하거나 혹은 장기 휴직케 하여 가사에만 종사케 만든다. 그들 여성들은 차츰 남편에 순종하고 열성적으로 남편을 돌보는 賢母良妻型의 인물로 변해간다. 지금 많은 중국의 남성들이 이런 현모양처형의 여성을 원한다. 여성 역시 결혼하기 전까지는 성격도 온순하고 순종적이나 결혼을 하고 또한 맞벌이를 하게 되면 삶이 고단해져 억센 여성으로 변하고 만다. 이런 여성들도 만약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자신이 돈벌 필요가 없어 집안 일에만 몰두하면 현모양처형의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대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노동자요 혁명 전사였던 중국 여성들은 기초화장 정도를 제외하고 색조화장을 한다든가 혹은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그 당시 상상할 수도 없었다. 중국 여성들이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은 개방 개혁 이후의 일이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미인 선발대회가 있을 수 없었다. 이는 여성을 상품화한다고 여겨 자본주의의 폐해로 까지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미인 선발대회를 개최하고 잡지 모델에 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백화점이나 일반 상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같이 화장품과 여성 의류 그리고 다이어트 식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를 받고 싶다는 여성으로서의 본능이 지금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그들 여성들은 이제 노동자와 혁명 전사를 남편으로 원하기보다 잘 생기고 지적이며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줄 남성을 원한다. 능력 있고 부유한 남성에게 시집가서 한 남성에게 종속되어 편안하게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는 여성들이 늘어가고 있으니 혁명 전사를 꿈꾸던 중국 여성들의 관점이 개방 개혁과 더불어 많이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중국 여성들 중에는 독립심이 강하고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당당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사람이 많다. 중국 여성들의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인식은 전국 부녀연맹회 통계조사국의 1991년도 보고를 보면, 중국의 전 여성 중 30%가 남성이 여성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여길 뿐, 50%는 여성과 남성의 능력은 동등하며,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업적을 남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전의 중국 여성들은 여성 전사로 여성 노동자로 남성과 같이 사회주의 전선에 참여하였고, 지금의 중국 여성들은 정치, 공업, 상업,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다. 전인대대표 중 20% 이상, 정치협상회의의 국가위원 중 13% 이상이 여성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90여 명의 여성이 성장(省長)과 장관급을 역임하였고, 7명의 여성이 전인대상무위원부주석을 역임하였다. 이런 숫자는 無區別的인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보다 여성의 고위직 참여가 적어 남녀 차별적인 면이 있다고도 볼 수는 있으나 한국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여성의 사회진출이 아주 뚜렷하다 할 수 있겠다. 현재 전 노동인구의 40%가 여성이고, 대학생의 1/3이 여학생이다. 공과대학 같은 경우는 남학생이 많으나, 문과대학이나 사범대학은 오히려 여학생이 많다. 중국의 경제적인 환경을 고려한다면 전 대학생의 1/3인 여학생의 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만약 한국이 중국과 같은 경제 수준이라면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기의 딸을 대학에 보내지 않아 대학에서 여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1/3에 훨씬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800만 명 이상의 여성 과학자와 기술자가 있다. 유전공학과 우주공학과 같은 첨단과학에 종사하는 여성 두뇌들이 적지 않고, 이들은 인공위성 발사나 남극탐험에 참가하기도 한다. 신화통신 직원의 30%가, 안전국·검찰·법원 등의 10%가, 초등학교 교원의 95%가, 유아원 보모나 백화점·호텔종업원의 대부분이 여성이다. 지금은 여성에 적합한 직업과 남성에 적합한 직업의 분화가 생겨나고 있다


음성양쇠(陰盛陽衰)

 

남녀가 전혀 구분이 없이 인민공사에서 집체생활을 하여온 중국에서는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억세다. 그들은 남성과 똑같이 직장생활을 하고 똑같이 퇴근하여 집안일을 한다. 이런 중국 여성들에게서 이전처럼 온순한 면모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당당하게 일어선 그들은 점점 그 성격이 억세어갔다. 길거리에서 남자와 여자가 말다툼을 하거나 남편과 아내가 싸움을 할 때 일반적으로 맞는 쪽은 남자요 남편인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중국에서 가부장적인 자취를 찾거나 유가문화의 흔적을 찾는 것은 모래 속에서 바늘 찾는 것처럼 어렵다. 유교의 자취는 중국에서 혁명을 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올림픽 같은 운동시합에 참여하여 메달을 따는 것은 대부분 여자선수들이다. 마준련이 이끄는 여자 육상 중장거리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탁구도 남자선수보다 등야평이 이끄는 여자 선수들이 금메달을 모두 휩쓴다. 여자 역도는 거의 전 체급이 세계적 수준이고 여자 수영 역시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서구 선수들과 나란히 금메달을 다투고 있다. 다이빙도 남자선수보다 여자선수들의 기량이 더 뛰어나고, 체조도 여자선수들의 기량이 낫다. 축구도 남자는 그 기량이 아시아 수준에도 뒤떨어지나 여자 축구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외의 체육 종목 중 남자선수들이 여자선수들 보다 더 나은 성적을 낸 부분이 없다. 이를 두고 중국인들은 중국이 음기가 세고 양기가 약한 음성양쇠(陰盛陽衰)의 나라라고 한다.
현재 중국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억세다. 남성과 같은 노동자 복장에 모택동 모자를 쓰고 남성과 같이 일하고 사회주의 혁명 대열에 뛰어든 중국 여성들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거의 남성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과 여의 구별이 없이 살아온 중국 여성들은 이미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아예 없고 사회주의 전사일 뿐이었다.
중국 여성들은 거의 남성처럼 혁명전사로 살아왔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미를 추구한다든지 남성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왔다. 어떤 면에서는 여성이면 반드시 가지고 있을 이런 여성으로서의 본능까지도 혁명이란 허울 앞에 억눌려 온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문혁세대인 40대, 50대 여성들은 아주 억세다. 그들에게서 여성미를 찾아보거나 웃는 모습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개방 개혁 이후의 세대인 20대 이하의 젊은 중국 여성들은 그 어머니 세대인 문혁세대와는 달리 매우 상냥하고 온순하며 여성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들 젊은 여성들에게서 여성 노동자 사회주의 여전사의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들도 자신의 어머니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여성들보다는 덜 상냥하고 덜 온순하며 덜 여성적이다.
중국에서는 여성들의 속 팬티를 볼 수 기회가 적지 않다. 인민공사에서 전혀 남녀 구별 없이 여성노동자로 살아온 중국 여성들은 수치심이 많이 희박해 보인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속 팬티를 보이며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언덕에서 여성들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장면도 흔히 볼 수 있다. 기차 여행을 하다보면 남자처럼 내복 차림으로 차안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여성들도 볼 수 있다. 여성들이 이렇게 수치심이 없는 것은 남녀의 구별이 전혀 없는 인민공사에서의 생활과 무구별적인 남녀평등 그리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 때문인 듯하다.


남성과 똑같이 힘든 일에 종사해온 여성들은 남편이 고분고분하고 밥투정 없고 온순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모범장부(模範丈夫)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여성들의 삶이 너무 고달파서 부지런하고, 온순하고, 근면하며, 음식투정하지 않는 남편이 아니면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남편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찾는다는 것은 모택동 이전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거친 중국 여성들에 지친 지금의 중국의 남성들은, 한국의 옛 여성과 같은 순종적인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여성을 찾아 결혼하기란 현재의 중국에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아침에 일 나가고 저녁에 돌아오는 중국 여성들에게 온순하고 착하기만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공처가와 처를 두려워하는 엄처가(嚴妻家)가 많다. 중국 남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가정적이다. 중국 남자들의 농담 중에 “당신 기관염(氣管炎)에 걸리지 않았나?”라고 묻는 마른 말이 있다. 이는 기관염과 아내가 엄하게 관리한다는 처관엄(妻管嚴)의 중국어 발음이 같기 때문에 생긴 농담이다. “당신 기관염(氣管炎)에 걸리지 않았나?”라고 묻는 것은 아내에게 꼼짝 못하고 사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중국 남성들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엄처시하에서 부인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고 살고 있다. 대부분의 가정일은 아내가 주관한다.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버는 여성들도 많다. 이런 경우는 남편이 아내에게 더 꼼짝을 못한다. 중국은 거의 다 맞벌이이고 또한 지금은 돈에 의해서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면 남편이 집에서 어느 정도 가장 대접을 받지만, 아내가 남편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면 대접은커녕 냉대를 받기 일쑤이다. 중국의 많은 남편들이 아내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있다. 개방 개혁이 된 이후 직업상 어느 정도 남녀 구분이 있고, 대부분의 직장에서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하며, 승진과 봉급에 있어서도 남녀간에 약간의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와 비교해 보면 직장에서의 남녀 사원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


중국의 남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가정적이다. 남편이 자전거로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며,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며, 부엌일도 하고 빨래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가사를 함께 행하고 있다. 중국의 남편들은 친구와 어울려 놀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친구와 어울려 갈만한 유흥업소도 별로 없거니와 또한 그런 곳이 있다 할지라도 돈이 없어 가지 못한다. 퇴근하면 대부분 바로 집으로 돌아와’ 가사 일을 돌본다. 굉장히 소박하고 가정적으로 산다. 귀가 하여 가사 일을 돌보는데 여성보다 남성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손님을 청해도 남편은 부엌에서 요리하고 아내가 응접실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가 많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함께 T.V를 보며 포커를 치고 잡담을 하며 또한 아이들 숙제를 돌보아 준다. 어떨 때는 부부가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남성들은 가정적이고 소박하다.


중국의 남편과 아내가 함께 직장을 나가는데, 실은 중국의 일거리 상 한 사람만 직장을 다니고 한 사람은 가사 일에 전념하여도 중국이 돌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서 중국인에게 ‘남편에게 이전의 두 배 월급을 주고 그 아내로 하여금 사직토록 하여 가사 일에 전념하게 한다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으면,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지금 중국 직장에 잉여 인력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해도 직장이 돌아가겠지만 중국인들은 돈을 더 벌려고 아내들로 하여금 직장을 그만두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아내들이 직장을 일시에 그만 두면 모를까 지금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처 : 진선인
글쓴이 : 진선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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