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복지신문
[스크랩] 가을 日記 본문
가을 日記 글 : 한 동
1 치자꽃이 진 자리
치자꽃 다 지고 난 망울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계절은 참 향기로웠습니다. 치자 꽃이 지고 난 자리에서 새순이 돋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자니 문득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진 녹색의 원래의 잎과는 확연히 다르게 보들보들하게 싹을 틔워 내는 치자나무 새순이 무척이나 올망졸망하니 귀여웁습니다. 언제든가 제 집을 방문하면서 치자나무을 사 들고 온 사람의 마음씨만큼이나 지난 치자 꽃의 향기는 고왔습니다. 저도 이처럼 당신에게 늘 향기 나는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2 가을 나무들을 보면
가을 나무들을 보면 참 기억력이 좋다 싶어집니다. 작년에 틔운 잎새를 기억하고 있다가 올해도 똑같은 잎새를 틔워 내더니 작년 가을의 색깔도 잊어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색칠 해 내 놓다니요. 저도 한결같은 그런 나무들을 따르고 싶습니다. 제가 당신을 섬기는 마음도 이처럼 한결 같이 변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을 덧칠하는 이기의 마음과, 세상을 물들이는 검은 세력을 다 벗어내고 나무들같이 내내 당신을 섬기는데 해가 바뀌어도 불평 안 하고 똑같은 모습으로 향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가을 우체국 앞에서
저는 지금 우체국 앞에 서 있습니다. 우체국 창문을 통해보면 누군가 그리운 가슴으로 발을 동동구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편지를 부칩니다. 편지를 받을 그 누군가가 문득 샘이 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으며 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요? 가을 우체국 앞을 지나다가 빨간 우체통에 그만 발목을 덜컥 잡히고 말았지만 언젠가는 나도 그리운 사람에게로 편지를 쓰고, 설레며 답장을 기다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금 우체국 앞에서 꿈 하나 만들고 있습니다.
4 가을산에 오르면
가을 산에 오르면 자북하게 산허리에 누워 있던 계절이 수줍어하며 나를 반겨 줍니다. 나의 가시 투성이인 가슴을 언제나 순하게 보듬어 주는 산. 숲을 지나다 어린아이의 손등 만한 잎 하나 따서 가슴에 품어보면 산은 내 안의 슬픈 일, 남을 용서하지 못한 일, 더 사랑하지 못한 죄까지 다 두고 가라 합니다. 언제나 찾아가도 나를 반겨 주는 가을 산. 세상일에 지쳐 투정하며 찾아가도 나를 반겨주는 가을산은 언제나 넉넉하게 웃어 줍니다.
5 가을 병
저는 지금 아름다운 병에 걸려 있습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친한 친구에게서 온 빛바랜 편지를 꺼내 읽어도 좀처럼 낫지 않는 불치병. 슬픈 일이 있어야 더 깊어진다던 당신의 말씀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충분하게 우울한 나. 저는 지금 참 아름다운 병에 걸려 있습니다.
6 몰래 오신 손님 같은
자고 일어나 보니, 창밖엔 어느 밤의 중간쯤에서 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참으로 살가운 가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너 참 오랜만이다… 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보니 비가 마치 사람 같아 보입니다. 정말이지 친한 친구를 만나는 듯한 기분으로 손을 내 밀면 금방이라도 악수를 해 줄 것만 같습니다. 가을비가 오는 날엔 아무도 슬퍼지는 일없이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7 가을 꽃을 사며
당신을 만나고 오던 길에 참 잘 생긴 가을꽃 한 묶음 사 왔습니다. 가을꽃의 잘 지치지 않는 마음을 사랑합니다.
나도 그처럼 세상일에 잘 지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수수하여 싫증 나지도 않고, 오래 두고 보아도 돌아서면 또 보고 싶은 가을꽃. 나도 당신 앞에서 잘 차려 입지 않아도 수수하여 싫증 안 나고 오래 오래 당신 한 분에게 그리운 사람으로 남는 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8 음악을 듣다보면
조지 윈스톤의 피아노시모에 귀가 허물어 진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이 아니면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연주곡에 가슴이 뭉클 해 집니다. 세상에 저리도 아름다운 소리가 있을까…. 괜히 나도 목소리를 아흠거려가며 노래를 불러보지만, 제 목소리에서는 걸걸함만 걸러 져 나옵니다. 제 목소리도 저처럼 아름다워서 아무에게나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지 윈스톤의 피아노 시모에 귀가 허물어 진 가을 날. 사는 일을 몹시도 좋아하던 동무가 문득 보고 싶습니다.
9 커피를 마시며
커피 한잔을 걸러 내어 가을빛이 쳐들어오는 창가로 가 앉아 우두커니 해바라기가 되어 봅니다. 고마운 가을빛은 참 맑은 얼굴로 웃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괜히 우울해 지는 가을. 내 집앞을 지나가는 아무라도 초대하여 세상사는 이야기라도 나누어보면 이 우울이 사라 져 줄까요? 한참을 식어 가는 줄 모르고 찻잔만 든 채로 해바라기가 되어 있어도 고마운 바람만 찾아 왔다 이내 시무룩한 제 속내를 알아 차렸는지 금세 돌아갑니다. 혼자 있는 가을 낮, 입술 거스러미를 뜯어내다가 결국… 피를 보고서야 나를 황홀한 빛살에서 풀어놓는 가을은 참 짓궂은 악동 같습니다.
10 당신의 말씀을 듣노라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않고 오히려 더럽히는 것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씀에 마음이 혹해졌습니다.
사심 없이 키워 왔던 제 안의 탐욕, 시기, 악의, 방황들까지 고스란히 숨겨 주시는 당신은 참 성스러운 빛. 당신 앞에 엎드려 참회의 눈물만 뚝, 뚝 흘리고 있어도 좋을 이 계절에 당신을 위해 제가 올리는 기도에서 가을꽃 향기가 나게 하여 주십시오.
참된 열매의 언어를 따기 위해
당신께, 날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고 자신만만 하고만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소스라치게 놀라 제 언어의 나무를 찬찬히 둘러봅니다. 거칠지 않은 온순함과 투박하지 않은 사근함과 더 없이 슬기로움의 열매가 달려야 함에도 지나치게 경박했거나, 지나치게 경솔했거나, 과장으로 물들어 익은 열매가 더 잘 자라지 않았나 싶은 마음에 덜컥 겁이 납니다. 이제부터라도 당신께 한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더욱 더 분별 있는 말만 하도록 날마다 제 언어의 나무에 겸허와 인내와 용서의 거름을 둘러 주고 묵묵히 오래 침묵하고 나서야 언어의 열매를 따겠습니다.
2005년 어느 가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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