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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복지신문
반환점 /정명순 반환점을 돌아 한 발짝 내밀었다 현기증이 난다 정신 없이 달려가 삼백육십도를 돌아오는 첫 걸음, 휘청거리며 중심이 무너진다 이제 돌아갈 길만 남았다 사십 구비를 달려온 길 자유라는 것은 언제나 새장 안의 손바닥만한 여지였을 뿐, 어쩌면 자유란 처음부터 없었다 주어진 조건 ..
새벽강에서 정명순 바람이 한 획을 긋자 안개 속으로 길이 난다 나무가 자란다 후두둑 몸을 털며 산이 하늘로 뜬다 깊은 강이 그려내는 수묵의 세상, 어느 것도 홀로 튀지 않고 모든 것이 또한 또렷이 서는 흑백의 조화, 시작은 무채색이었다
이별여행 정명순 그리움이니 아쉬움이니 절절하게 조여오는 숨결이니 모든 허황한 단어는 빼내기로 한다 그저 겨울 들녘에 서있는 전신주처럼 차갑게, 떨림도 감추기로 한다 단 한 번 보았던 개기 월식 혼자서는 빛을 내 본 적이 없는 달은 해의 먼 배경이었다 가까이 다가설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
세대차이 정명순 상조회에서 조기(弔旗)를 만드는데 서로 엇갈리는 바람에 두 개가 만들어졌다 노인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불길하다고 젊은이들은 뭔 상관이냐고 별 걱정을 다한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쌍초상이 났다 조기 두 개를 동시에 쓸 일이 생겼다 노인들은 두 개 만든 탓이라고 젊은이들..
겨우살이 정명순 홀로 견디어 서기도 힘에 부친 긴 겨울 언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버려진 것들, 안아 올려 겨드랑이에 끼고 말라버린 젖을 물리는 겨울, 자작나무 봄은 멀기만 하다 *겨우살이 : 나무 줄기 속에 뿌리를 박아서 수액을 얻는 기생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