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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복지신문
바이러스/정명순 어느 해 여름, 폭염 속에 의식을 잃은 적이 있다 독감 바이러스는 모세 혈관 구석구석을 파고들며 영역을 넓혔다 몸 안에 자리를 잡은 그는 사지를 무력화시키더니 급기야 뇌에까지 치명상을 입혔다 다른 모든 기억을 지웠다 사소한 하루의 일상은 이미 내 것이 아닌 채 오직 그만이 ..
수도꼭지가 울다 정명순 가끔, 화장실 문이 잠기고 수도꼭지가 펑펑 울었다 훌쩍이지 않아도 참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눈물 붉어진 눈자위 부끄럼처럼 감출 필요 없는 참으로 깔끔한 울음 취기醉氣를 핑계로 응어리를 게워내고 싶은 날이면 수도꼭지가 펑펑 울어 주었다 그렇게 부끄러운 내 눈물을 ..
삼초 정명순 요란스런 예초기 소리가 풀을 베고 있다 조근조근 낫을 들이댈 수조차 없이 잡초넝쿨 우거진 아버지의 무덤 미안해요, 한 마디에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던 그 날처럼, 아버지는 침묵으로 용서해 주실까 얼키설키 병病을 휘감고 마른 장작처럼 침대 위해 놓여있던 아버지, 덥수룩한 머리카..
드라이플라워/정명순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급한 김에 한 할머니가 모퉁이에 앉아 주섬주섬 속옷을 내리는데 홀로된 시간만큼 겹겹이 입은 옷들이 녹슨 돌쩌귀처럼 버걱버걱 내려가더라 치마를 말아 올려 겨드랑이에 끼고 속바지를 말아 내리는데 숨이 다 차 오르는 거라 드디어 가장 은밀한 ..
외출 / 정명순 아침 일찍 서둘러 세수를 하고 뒤적뒤적 옷을 차려입는다 -노인네는 냄새가 나는 겨 손녀딸이 사준 향수 한 방울 겨드랑이에 뿌려 마무리하는 엄마 한 달에 한 번 외출하는 날이다 풍(風)을 맞아 세월의 풍파(風波)에 부서져 이젠 성한 것은 정신 하나 뿐인 까닭에 시간은 더욱 또렷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