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예술세계 (548)
서울복지신문
반지 /정명순 약속이 빙빙 돈다 들어맞지 않는 너의 주위를 미련이, 미련하게 빙빙 돈다 팽팽하던 관계는 점점 야위어 이제는 더 이상 사랑으로든 미움으로든 깊은 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는데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습관처럼 붙어있는 사이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난다. 그런데 막상 빼버리려면 걸린다 ..
독주/정명순 창문으로 눈발이 달려든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악착같이 달라붙는다 눈발은 제 무게로 고스란히 쌓이고 옴싹 달싹 못하는 잔가지는 휘청거리며 가늘게 신음을 낸다 신음은 기이한 울음소리로 변하여 창 틈으로 기어 들어온다 눈이 쌓일수록 깊어지는 어둠 한 잔의 술을 마신다 모세혈관..
기다림/정명순 땅속으로 땅속으로 잦아들며 기적소리 유난히 크게 우는 날은 약속처럼 비가 내렸다 온다는 기약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간이역도 없는 작은 건널목에 서서 한 번도 멈추지 않는 기차를 보내곤 했다 조용히 제 발등에 낙엽 떨구는 선로 옆 소나무처럼, 떠나 보내는 일이 일..
구겨진 이름/정명순 주머니에 가득 받아 넣은 명함들이 세탁기 속에서 너덜너덜 해졌다 화려한 금박의 수식어는 떨어져 나가고 이름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김인지 박인지 성조차 가물가물한 그 사람이 누구였더라 마이크를 독차지하고 고래고래 소리 높이던 그 뚱뚱한 남자였던가 연거푸 술잔을 원수..
목숨 - 박진성의 『목숨』에게 /정명순 한 목숨을 등에 지고 새벽 산에 올랐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난무(亂霧) 사이로 가장 또렷하게 빛나는 생명이 있었으니 슬픔을 뽑아내 길을 짜고 있는 거미였다 허공에 매달린 길, 링거액이 떨어지듯 이슬을 떨구는 28세 젊은 시인이 거기 있었다 통증을 풀어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