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예술세계/마음의창 (238)
서울복지신문
목숨 - 박진성의 『목숨』에게 /정명순 한 목숨을 등에 지고 새벽 산에 올랐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난무(亂霧) 사이로 가장 또렷하게 빛나는 생명이 있었으니 슬픔을 뽑아내 길을 짜고 있는 거미였다 허공에 매달린 길, 링거액이 떨어지듯 이슬을 떨구는 28세 젊은 시인이 거기 있었다 통증을 풀어낸 ..
거시기 /정명순 무더위 탓인 게야 발정 난 수캐가 송글송글 암컷을 넘보는 것은 햇살 아래 잠자리 떼는 또 어떻구 암 수 서로 한 몸이 되어 저리도 당당하게 거시기 하니 남사스러워서 눈 감는 건 되려 나여 대낮에도 얼굴 붉히지 않는 짐승들의 사랑 사람이라 부끄러운 겨 죄 많은 사람이라 거시기라..
장마/정명순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간대 그럼 난 북으로 가야할까 전선이 다시 북상을 하면 나는 또 남으로 내려 가야할까 충남 홍성 백월산 자락, 딱 중간이지 스쳐가기 좋은 길목 그래서 늘 오는 비에 젖고 가는 비에 또 그렇게 젖곤 하지 산허리 오르내리는 길목 어디쯤 자리잡은 탁자 하나 뿐인 주..
호우주의보/정명순 무섭게 다가오는 그대 삼켜버릴 듯이 그리하여 다시는 못 볼 듯이 달려와 나를 휘감는다 딱 한 번 본 순간 운명을 바꿔버린 눈 빛 그 때부터였을까 나는 쩍쩍 갈라지는 갈증의 길을 걸었다 기다림으로 일렁이던 물결은 메말라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처럼 부끄러울 것도 설레일 것도 ..
양파/정명순 겹겹이 껍질뿐인 삶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가장 깊은 속부터 썩어 나오는 생을 본 적이 있는가 한 켜 한 켜 무너져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겉은 눈부시게 희다 나는 오늘도 하얗게 웃는다